사회복지법인 무궁화 동산(무궁화 전자) 방문 인사말
□ 정동영 당의장
여기 노란 점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열린우리당의 출마자들이다.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하고 반가워하는 얘기는 저보다는 장향숙씨가 해 주실 것이다.
정말 귀하게 소개시켜 드릴 분이 장향숙씨이다. 장향숙씨도 예전에 전자공장을 다닌 적이 있다. 여러분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학교는 입학도 못했지만 책을 만권도 더 읽었다. 만권을 집에 갖다 놓으면 방 하나 꽉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에 만권 이상 읽은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불편한 몸이지만 앞장서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분이다. 우리당의 비례대표 1번 후보로 4월 15일 100% 국회에 들어간다. 장향숙씨가 국회에 들어가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국회의사당 통로와 연설대부터 바꿔야 하고 국정감사때 보건복지부, 장애인공단 가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다 제거할 것이다. 답답하고 가려운 것을 장향숙 씨가 앞장서서 다 해결할 것이다. 뜨거운 박수로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
□ 장향숙 후보
여러분들은 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22살 때 어느 목사님이 구해준 휠체어를 타고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 골목에서 내가 바라본 세상이 너무 낯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도 너무 낯설어 세상이 너무 눈부시다고 표현했다. 지금 우리가 낯설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최초의 여성 장애인이라는 것이 그 변화를 말해준다. 서른이 넘어 직업재활학교에 들어가 2년간 직업교육을 받았지만 취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행복한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상황이었다.
수원에서 석달정도 수원시립복지관의 자립장에서 카스테레오를 조립하는 일을 했었다. 어느 날은 16시간 일하고 어느 날은 일이 없어 16시간을 대기하고, 그렇게 3개월 동안 일하고 받은 돈은 24만원이었다. 그것은 나보다 젊고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청년들이 내가 있으면 그만큼 더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100일만 일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 사회에서 나에게 직업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겠다고 생각해 장애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전에는 문맹인 여성장애인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후로는 글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의식교육도 병행했다. 우리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지 않고 내 이웃이 나를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지금도 단칸 월세방에서 살고 있다.
1998년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을 만들어 부산여성장애인연대 회장을 6년간 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소를 개설했고 최초로 여성장애인 전문직업재활팀이 있다. 저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사무실에는 다 대학을 나왔다. 아직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56만 여성 장애인, 145만 장애인, 450만에 이르는 그 가족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장애인의 직업을 만들겠다. 모든 장애인들이 다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기초를 만들겠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내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나라를 내가 만들기 위해서였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20년 동안 장애인 인권운동 하니까 열린우리당에서 저보고 국회의원 하라고 하더라.
대한민국의 많은 장애인들과 소외계층과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좋은 정치를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저에게 비례대표 1번을 줬다고 판단한다. 국회의원이 된 후 다시 오겠다. 여러분들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일하자.
2004년 3월 30일
열린우리당 대변인실
여기 노란 점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열린우리당의 출마자들이다.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하고 반가워하는 얘기는 저보다는 장향숙씨가 해 주실 것이다.
정말 귀하게 소개시켜 드릴 분이 장향숙씨이다. 장향숙씨도 예전에 전자공장을 다닌 적이 있다. 여러분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학교는 입학도 못했지만 책을 만권도 더 읽었다. 만권을 집에 갖다 놓으면 방 하나 꽉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에 만권 이상 읽은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불편한 몸이지만 앞장서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분이다. 우리당의 비례대표 1번 후보로 4월 15일 100% 국회에 들어간다. 장향숙씨가 국회에 들어가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국회의사당 통로와 연설대부터 바꿔야 하고 국정감사때 보건복지부, 장애인공단 가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다 제거할 것이다. 답답하고 가려운 것을 장향숙 씨가 앞장서서 다 해결할 것이다. 뜨거운 박수로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
□ 장향숙 후보
여러분들은 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22살 때 어느 목사님이 구해준 휠체어를 타고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 골목에서 내가 바라본 세상이 너무 낯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도 너무 낯설어 세상이 너무 눈부시다고 표현했다. 지금 우리가 낯설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최초의 여성 장애인이라는 것이 그 변화를 말해준다. 서른이 넘어 직업재활학교에 들어가 2년간 직업교육을 받았지만 취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행복한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상황이었다.
수원에서 석달정도 수원시립복지관의 자립장에서 카스테레오를 조립하는 일을 했었다. 어느 날은 16시간 일하고 어느 날은 일이 없어 16시간을 대기하고, 그렇게 3개월 동안 일하고 받은 돈은 24만원이었다. 그것은 나보다 젊고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청년들이 내가 있으면 그만큼 더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100일만 일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 사회에서 나에게 직업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겠다고 생각해 장애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전에는 문맹인 여성장애인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후로는 글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의식교육도 병행했다. 우리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지 않고 내 이웃이 나를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지금도 단칸 월세방에서 살고 있다.
1998년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을 만들어 부산여성장애인연대 회장을 6년간 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소를 개설했고 최초로 여성장애인 전문직업재활팀이 있다. 저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사무실에는 다 대학을 나왔다. 아직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56만 여성 장애인, 145만 장애인, 450만에 이르는 그 가족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장애인의 직업을 만들겠다. 모든 장애인들이 다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기초를 만들겠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내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나라를 내가 만들기 위해서였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20년 동안 장애인 인권운동 하니까 열린우리당에서 저보고 국회의원 하라고 하더라.
대한민국의 많은 장애인들과 소외계층과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좋은 정치를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저에게 비례대표 1번을 줬다고 판단한다. 국회의원이 된 후 다시 오겠다. 여러분들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일하자.
2004년 3월 30일
열린우리당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