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으면서 - 정동영 당의장
여러 날 황사가 서울 하늘을 뒤 덥기는 했으나 올 해 봄은 유난히 쾌청하다.
가정의 달이 되어 우리 집은 무엇보다 작년 5월 4일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주기를 맞았다. 맨 아래 동생의 딸인 막내 조카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으로 어린이가 없지는 않으나 지난 해 어머니를 여윈 나로서는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감회가 우선하지 않을 수 없다.
83세의 연세로 세상을 뜨시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아직 어머님의 별세가 실감나지 않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더 많은 시간 좀 더 극진히 모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여전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머님 곁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시골집을 처분하고 솔가하여 서울 사근동으로 올라오셨다. 어머니는 그 때 이미 4년 전 가장을 잃은 홀몸이셨고, 나를 비롯해 4형제의 생계와 학업을 책임지고 계시던 어려운 처지셨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아들 넷을 다 대학 공부를 시키고 뒷바라지 하셨다. 나와 막내 동생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으나, 둘째와 셋째는 우리 식구가 처한 환경을 잘 이해하는 속 깊은 아들이었다. 둘 다 고등학교 시절 한두 해씩 학교를 쉬며 어머니의 봉제일을 도왔다. 둘째 동생은 두 해나 뒤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에도, 그 어린 나이에 나름대로 장사를 하며 야간대학을 쉬며 다니기를 계속했고, 기어이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했다. 셋째 동생은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휴학하고서는 어머니를 도와 동대문 평화시장을 드나들었다.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은행에 취직했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야간대학을 마쳤다. 그런 형제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어머님도 힘드셨을 테지만 무엇보다 네 아들이 다 대학을 마치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부족한 형으로서 동생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맞아들인 내게 동생들과는 다른 대우를 하셨다. 방학 때 시골집으로 내려가면 한 솥에 밥을 지으면서도 한 쪽에는 쌀을 안치고 한 쪽에는 보리쌀을 안치는 방식으로 아버님과 내 밥사발에만 쌀밥을 퍼 담으셨다. 그 시절 자식 많은 집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었으나 이제 넉넉한 시절이 되었고, 또한 가정을 달을 맞이하여 되짚어 보니 어머니의 편애와 동생들의 희생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결혼 뒤 우리는 불광동으로 이사 했다. 그 집에서 어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동생 셋이 생활하게 되었다. 아내는 집 근처에서 피아노 교습을 했다. 곧 아이가 태어나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아내의 피아노 학원은 우리 가계의 중요한 수입이었고 위안이었다. 어머니는 아내의 직업으로 인해 당신께서 맏손자를 맡아보셔야 했다.
어머니는 맏아들인 나와 같이 맏손자에 대한 애정 또한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한 할머니의 사랑에 부응하여 욱진이의 할머니에 대한 공경심도 남달랐다. 어머니와 욱진이는 떨어져서는 못살 찰떡과 같은 사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극구 유학을 가겠노라고 우기며 스스로 미국에 있는 고등학교 편입학 서류를 마련하고, 나와 아내를 설득한 배경에도 할머니의 응원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주위에서 신통방통한 효손(孝孫)이라고 칭찬받던 욱진이가 할머니 동의가 없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감행했을 리 없다. 정작 부모인 나와 아내는 아들의 유학에 관한 성원도 배려도 부족했고 유학수속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욱진이는 미국에 도착한 후에도 전화를 하면 할머니부터 찾았고, 시간 나는 대로 국제전화를 통해 할머니와 통화를 지속했다. 그러고 보면 나와 욱진이는 맏아들과 맏손자로 다 함께 어머니의 애정을 받았지만, 다정다감하게 어머니를 대한 쪽은 아들인 내가 아니라 손자인 욱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랑거리는 두 가지였다. 내가 MBC에 입사한 뒤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고향 분들한테 이런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서울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기에 아들이 매일 텔레비전에 나오게 한답니까?”
하지만 최근에는 어머니 스스로 다른 분들께 이렇게 자랑하셨다고 한다 “우리 손주는 저 멀리 유학을 가서도 틈만 나면 이 할머니한테 전화를 해요.”
날씨는 청명하고 봄꽃은 스스로 화사하게 피어나지만 올 해 봄, 가정의 달이 되었건만 나는 유쾌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서글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유쾌하지 못한 이유는 지난 해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를 모신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몸이라 아직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불효의 죄스러움에 잠겨 있기 때문이고, 서글프지 않은 까닭은 고마운 동생들이 있고 제수 분들이 계시며, 우리 아이들이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 아버님 곁에 편히 누워 계신 어머니께서는 아들들과 손주들을 그윽한 자애의 눈길로 지켜보시고 계시리라는 믿음으로 불효한 자신을 위안한다. 아파트 앞뜰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치고 공기는 맑고 싱그러워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가정의 달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세상 모든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